성별.

사자에게 쫓기던 사슴이 돌연 돌아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한다.


사슴: 잠깐, 이게 아닌것 같아. 난 진짜 이게 아닌것 같아.
사자: 그럼 뭔데?
사슴: 사실 난 너희가 하는 그런 것쯤 할 수 있을것같아.
사자: 무슨 말이야.
사슴: 두고봐. 시간을 좀 줘.


한달쯤 지난 무렵.
저 멀리서 사슴이 토끼를 쫓고 있다.


사슴이 단숨에 뛰어 토끼를 앞 발로 후려치더니 풀 뜯던 앞니로 토끼의 숨통을 물어 죽인다.
이 광경을 보던 사자가 얼른 달려오더니 언제 이렇게 성장했느냐며 호의를 보인다.


사슴: 송곳니가 무뎌서 그렇지 나름 방법을 터득했어. 나 말고 저 언덕 너머에는 토끼뿐만 아니라 여우도 잡는 친구도 있어. 굉장하지.
사자: 오! 괜찮은데?
사슴: 게다가 우린 너희들과는 달라서 애들이 도망도 안가, 설사 도망가더라도 우린 지구력이 있어서 결국엔 성공하고 말지.
사자: 오! 정말 괜찮은데?


한달쯤 지난 무렵.
저 멀리 사자 무리 속에서 날렵히 껑충껑충 뛰어 먹이를 낙아채는 사슴 한 두 마리가 보인다.
사자처럼 큰 먹이를 잡지는 못하지만 그 틈바구니 속에서 심심찮게 나름 혁혁한 공을 세우며 인정을 받고 있다. 


사슴: 늘 고기만 먹어서 그런지 소화가 잘 안되는 것 같은데 한달에 한번 정도 사냥을 쉬고 풀을 뜯어야겠어.
사자: 음... 


한달쯤 지난 무렵.
이제는 사냥하는 사슴 숫자가 늘어 사자무리인지 사슴무리인지 분간이 안된다.
사자는 한달 내내 쉴새 없이 먹이를 잡는 반면 사슴은 한달에 한두번씩 쉬어가며 사자 무리 속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힘들게 뛰던 사자가 허탕을 치고 돌아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한다.


사자: 이건 뭔가 아닌것 같아.
사슴: 뭐가?
사자: 이건 뭔가 진짜 아닌것 같아. 너흰 왜 그렇게 맘 편히 쉬는건데? 이럼 우리가 억울해지잖아. 우린 풀 따위 못 먹잖아. 너흰 그렇게 편히 풀을 뜯는데 우린 그사이에도 먹이를 노려보며 뛰어다녀야하잖아. 이건 좀 이상해.
사슴: 우린 초식동물이잖아. 당연한거아냐? 그대신 너흰 그 날카로운 이빨로 썩썩 더 많이 먹잖아. 우린 너희가 두 세점 꿀꺽할동안 이 평평한 어금니로 겨우 한 조각 짖이겨 먹는단 말야. 우린 그만큼 불리해. 그만큼 너희가 이해하고 인정해주어야지. 쪼잔하게 왜그래? 사자답지 않게...
사자: ...그런가. 듣고보니 그러네...
사슴: 우린 초식동물, 육식동물이기 이전에 다같이 동물이란 점을 잊지마. 우린 평등해.


한달쯤 지난 무렵.
사자무리 속에, 정확히는 사슴무리속 사자무리속에 앞니를 뾰족히 세운 토끼무리가 쥐를 쫓고 있다. 토끼는 쥐를 잡아 한입 베어물고는 사자에게 가져다 준 후 사슴과 함께 월차를 즐긴다.
그 사이 무리중 한 사자가 어느날 사슴 한 마리를 잡아 물고는 돌아왔다.


사슴: 으악! 이게 무슨 짓이야?
사자: 왜?
사슴: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어쩜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사자: 무슨 말이야?
사슴: 어떻게 사슴을 먹이로 생각할 수가 있어?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사자: 좀 그럴수도 있지 뭘그래? 배가 너무 고파서 그랬어. 
사슴: 이런 몰상식한 사자같으니라고. 넌 지금 큰 실수한거야. 다들 가만있을거같아? 큰일날 사자네 이 사자!
사자: 아니 불과 몇달전만 해도 다 이렇게 했었어! 내가 배가 고파서 그랬거늘 뭐 이게 큰일이야?!
사슴: 큰일인지 아닌지는 두고 볼 일이지.


그 다음날.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그 사자는 모두의 경멸속에 무리로부터 추방을 당했다.


한달쯤 지난 무렵.
사슴과 토끼 수는 점점 늘어만 갔다. 특히 토끼 수는 하루가 다르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사자는 점점 줄어드는 사냥감때문에 걱정이 많았지만 
사슴과 토끼는 간간히 뜯어먹는 풀 덕분에 걱정이 좀 덜했다. 하지만 토끼 개체수가 워낙 많아져 풀도 간당간당한 상황이라 모두가 신경이 날카롭다.


사자: 뭔가 대책이 필요한것 같은데, 너흰 풀이 있으니까 상관없겠지만 뭔가 대책이 시급해.
사슴: 무슨 대책?
사자: 요즘 사냥감이 너무 부족해서 그런데 너희들 중 몇몇을 투표로 잡아먹는 것은 어떨까?
토끼: 아니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너 제정신이야? 
사슴: 이 미친새끼! 넌 이새끼야 넌 미쳤어. 뭐 이런게 다 있어? 가뜩이나 풀도 모자라 신경쓰이는판에 무슨 시대에 역행하는 개소릴 하고 지랄이냐. 에라이 미친 또라이같으니라고. 세상이 흉흉해도 유분수지, 뭐 이런게 다있어?


그날.
바로 그날 그 사자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슴과 토끼에게 잡아 먹혔다. 
차마 사자들은 선뜻 먹지 못했으나 몇몇은 마지못해 눈치를 보며 몇입 깨무는 시늉을 하곤했다.


한달쯤 지난 무렵.
사자는 이제 드믄드믄 보이던 사냥감들도 보이지 않아 굶주림에 너무나 힘겨웠다.


사자1: 아... 너무 배가 고픈데 저기 저 사슴 다리 한짝만 씹어먹으면 안될까?
사자2: 너 미쳤어?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사자가 할 도리가 있지. 정신 바짝차려. 사자임을 잊어선 안돼. 힘을 내자. 분명히 좋은 날이 올거야. 꾿꾿히 버텨서 사자다운 모습을 보이자.
사자3: ... 말 안할라 그랬는데... 그래서 난 사실 얼마전부터 조금씩 풀을 먹고 있어.
사자1: 와... 그건 정말 할짓이 아니지. 사자 체면이 있지.
사자2: 오... 그 생각은 못해봤는데. 괜찮은데? 꽤 괜찮은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이야.
사자3: 어 생각보다 괜찮아. 생각하기 나름이지 뭐. 고정관념이야 다. 괜한 자존심 버리고 사자들 눈만 신경쓰지 않으면 되는거야. 부모님 보기에 좀 그래서 그렇지. 난 정말 괜찮아.
사자2: 괜찮다. 나도 한번 해봐야겠는데... 근데 사슴들이 뭐라 안그래?
사자3: 풀이 요즘 부족해서 좀 눈치보이긴 하는데 그래도 요즘 세상에 그런게 어딨어. 세상이 좋아져서 이제 그런걸로 시비거는 애들 별로 없어.
사자1: 흠... 난 잘 모르겠다.
사자2: 맞아 세상이 어느땐데 그런게 어딨어. 좋은 생각이다. 오히려 좀 멋진데?


한달쯤 지난 무렵.
저 멀리서 사냥꾼이 지프차를 타고 부릉부릉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온다.


황량한 사막에 흰 토끼들이 점점이 죽어있고 그 사이 사이 사슴들이 꼬꾸라져 있으며
뼈만 앙상한 사자가 풀을 토하며 신음하고 있다. 


잠시 둘러본 사냥꾼은 혀를 끌끌 차고는,
사냥꾼: 뭔 놈들이 장난을 쳐놨나 쓸만한게 없냐. 아깝게시리. 
다음 언덕으로 차를 몰고 부르릉 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