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뚜껑.

길에 떨어져 있는 병뚜껑을(주로 맥주, 사이다, 콜라) 주워 모은다.
망치로 그 병 뚜껑을 잘 쳐서 둥근 딱지 모양이 되도록 평평하게 편다.
'병뚜껑 까기'는 재료만 다를 뿐 딱지치기와 흡사하다.


다만, 미제 병뚜껑은 귀해서 국산 병맥주 뚜껑 10개가 미제 1개와 교환되곤 했다.
그나마 그것도 맘씨 좋은 친구라야 가능했다.


우리는 거의 매일 얼음 땡, 숨바꼭질이 아니라면 이 '병뚜껑 까기' 놀이를 했다.


옆집 상철이 형은 그것의 일인자였다. 난 워낙 어려 잘하진 못했지만 늘 그 형의 귀여움을 받으며 그 틈바구니에서 형의 승리를 내 것인양 구경하며 간혹 떨어지는 빳빳한 병 뚜껑 전리품에 기뻐하곤 했다.


이제 나도 슬슬 팔에 힘이 붙고 요령도 생겨 형들과 아슬아슬한 승부에 빠져갈즈음.
 성민이가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다.


성민이는 사우디에서 건설쪽 일을 하는 아빠를 따라 4년간 해외에서 살다가 왔다. 나와 동갑이기도하고 우리 골목으로 이사를 와서 다른 형들보다 나는 성민이에게 이것 저것을 알려주며 친해지게 되었다. 성민이는 나름 적응이 빨랐다. 키도 형들만큼 커서 얼음 땡도 무리없이 소화해 내었고, 숨바꼭질은 특유의 침착함으로 왠만해선 들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성민이도 요령과 경험을 요하는 '뚜껑 까기'에는 서투른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나에게 이것 저것 요령을 묻고 하고자 했으나,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지 그 놀이를 할때면 그냥 집에 들어가버리곤 했다. 한번은 안쓰러움을 느낀 내가 큰 맘을 먹고 성민이에게 귀한 나의 버드와이저 뚜껑 1개를 천연사이다 뚜껑 5개만 받고 바꿔주겠다고 했더니, 자기는 버드와이저를 형들이 대체 왜 힘들게 망치로 두드려 편 국산 10개랑 바꾸는지 이해가 안간다며 어차피 뚜껑을 망치로 펴는데는 국산이고 외제고 다 같이 힘든데 자기는 이해가 대체 안간다고 털어놨다. 그러더니 나보고 그지같이 병뚜껑이나 만지지말고 그냥 자기랑 집에 들어가서 게임이나 하자고 한다. 무슨 게임이냐 했더니, 패밀리라는 비디오 게임이란다. 난생 들어본적이 없는 그런 것에 그게 뭐냐했더니 텔레비젼에 연결해서 하는 오락이란다. 병따개따위는 째바리도 안되게 재미난 것이라기에 처음으로 성민이 집에 가게 되었다.


뿅뿅뿅.


성민이 집에서 보낸 대략 2시간. 그 짧은 시간, 병뚜껑은 저 멀리 사라졌다.


그 다음부터 난 성민이가 집에 들어가면 나도 슬쩍 병뚜껑 놀이에서 빠져나와 성민이네 집에 놀러가곤 했다. 그렇게 몇번을 했더니 어느새 동네 형들이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형들 중 몇명이 성민이네 집에 있는 뿅뿅이를 자기도 하고 싶다며 다음에 갈때 자기도 데려가라고 했다. 난 성민이에게 물어본다고 했다. 성민이에게 물어봤더니 내가 알아서 하란다. 단, 너무 많으면 엄마가 싫어하니까 한번에 2명정도만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형들의 부탁에 맘이 무거워졌다. 한번 가본 형들은 기어코 이번에도 가려했고, 나는 그때마다 이리저리 난처함에 빠졌다. 그러는 사이 점점 모두가 방과후 성민이네 집에서 놀려고 줄을 섰다. 선택받지 못한 형들은 밖에서 얼음 땡이나 술래잡기, 병뚜껑 놀이를 입이 툭 튀어나온채 무심히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상철이형이 나에게 오더니 버드와이져 10개를 줄테니까 앞으로 맨날 자기를 데리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 이미 나는 병뚜껑을 잊은지 오랜 후여서 고민할것도 없었지만 상철이형이 나를 그렇게나 챙겨줬던게 생각이나서 모른척 고맙다며 받고는 앞으로 그러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 말고 2명을 더 데려가는데 항상 상철이형을 데려 간다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처음 몇번은 그렇게 했는데 점점 다른 형들의 불만이 견디기 힘든 지경에 다다랐다. 그래서 난 상철이형에게 성민이가 다른 애들한테도 공평히 기회를 줘야한다고 말했다고 둘러데며 앞으로 형만 데려가는게 좀 어려워졌다고 했다. 그랬더니 형이 곰곰히 생각하더니 그럼 너는 왜 맨날 가냐고, 그럼 너도 돌아가면서 가야지 왜 항상 너는 맨날 그 3명중 하나냐면서 화를 냈다. 나는 듣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 나는 형에게 버드와이져 10개랑 내가 가진것 중 미제 병뚜껑을 형이 달라는데로 주겠으니 참아달라고 했다. 형은 단번에 필요없다며 이제부터는 성민이네 가는걸 가위바위보로 결정하겠다고 형들 앞에서 선언했다. 난 갑자기 억울해서 그런게 어딨냐며 성민이가 나는 매일 와도 된다고 했다고 소리를 질렀다. 형들은 내 말에 주춤하는가싶더니 이내 그럼 성민이한테 직접 물어보자며 우루루루 성민이네 집으로 갔다. 성민이는 가만히 좌초지종을 듣더니 침착한 말투로 자기는 나한테 매일 와도 된다는 그런말을 한적은 없다고 했다. 자기는 그냥 게임이 2인용이라 짝을 맞춰 자기까지 4명정도면 엄마한테 안혼나고 조용히 놀 수 있어서 그런것이라 했다. 어라?... 그랬었나? 듣고 보니 그런가... 뭐지 이게 대체 하는 사이, 형들은 하나 둘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이 안났다. 지릿하게 오줌이 마려웠다. 쭈삣쭈삣 내가 상철이형을 쳐다보자 침묵을 깨고 상철이형이 나를 밀치며 왜 뻥깠냐고 나에게 욕을 하기 시작했다. 난 당혹감에 어이가 없고 할 말이 없어 형들과 성민이를 멍하니 바라만 봤다. 나를 노려보던 상철이형이 이내 성민이에게 다가가 뭐라뭐라 하더니 다른 형 몇명이랑 성민이네로 들어가버렸다. 문이 닫혔다. 곧 특유의 텔레비젼 켜지는 느낌이 나더니 들릴듯 말듯 뿅뿅소리가 들려왔다. 곧 나머지 형들은 다방구나 하자며 공터로 갔고, 나는 멍하니 성민이네 집앞에 서있다가 가로등이 켜질때쯤 집으로 왔다. 먹먹히 아무생각이 안들었다. 밤이 으슥해 이불에 누웠을 즈음 문득 드는 생각이.


어... 오늘은 족히 다섯명쯤은 들어간것같은데...